기아 K9 20년 전 목표에 닿다
기아 K9 20년 전 목표에 닿다
2003년 3편으로 방영했던 기아 오피러스 TV 광고 시리즈를 기억하는 이가 있을까?
간략히 소개하면 오피러스가 호텔에 들어올 때마다 차주가 운전석과 뒷좌석에서 무작위로 내리는 통에 직원이 어느 문을 열어 맞이해야 할지 당황한다는 내용이었다.
즉 뒷좌석 의전용 차로 쓸 만큼 고급스럽지만, 직접 운전하기도 좋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는데
실제 오피러스는 그다지 운전이 즐거운 차는 아니었다.
케케묵은 옛 광고 얘기를 꺼낸 이유는 기아 K9를 타며 그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길이 5140mm 덩치와 편안한 승차감이 어우러진 의전용으로 손색없는 세단이 운전도 즐겁다.
물론 타이어를 아스팔트에 짓이기고, 배기구로 우렁차게 포효하는 그런 아찔한 종류의 즐거움은 아니다.
균형 잡힌 승차감과 섬세한 질감을 누리는 우아한 즐거움이다.
승차감이 가장 매력적이었다. 고속도로 위를 묵직하게 미끄러지는 움직임이 마치 찐득한 기름이 흐르는 강을 떠다니듯이 진중했다.
느릿느릿 위아래로 흔들리는 커다란 보닛을 바라볼 때의 만족감이란 그러면서도 바닥에 착 깔린다.
과거 높다란 무게중심 때문에 휘청거렸던 오피러스와 달리, 무게중심은 납작하게 내리깔고 스티어링휠엔 무게를 더해 비교도 할 수 없이 안정적이다.
우월한 구조와 기술이 녹아든 결과다. 기본적으로 뒷바퀴굴림 구조로 빚은 K9는 앞바퀴가
앞범퍼에 바짝 붙고, 뒤쪽으로는 동력 축이 이어져 앞뒤 무게 배분이 균일하다.
더욱이 운전자 엉덩이가 정확히 앞뒤 바퀴 가운데에 자리 잡아 물리적으로 흔들림이 적다.
카메라와 GPS로 도로를 미리 읽고 댐퍼를 조율하는 ‘프리뷰 전자제어 서스펜션’과 상황에
따라 스티어링 기어비를 주무르는 ‘가변 기어비 스티어링’ 등 기술적 우위는 당연하고.
가속 페달을 밟으면 3.8L 엔진이 간질거리는 6기통 진동과 함께 매끄럽게 속도를 더한다.
엔진회전수를 따라 토크가 선형적으로 오르고, 스로틀 반응은 페달과 기계적으로 이어진 듯 신속하다(K9도 그렇지만, 요즘은 모두 전자식 스로틀이다).
특히 소리가 좋다.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으면 분당 엔진회전수가 최고 6700까지 치달으며 상쾌한 소리를 퍼뜨린다.
그렇다. 이 차는 자연흡기 엔진을 얹었다. 터보가 당연한 요즘 세상에 오랜만에 만난 자연흡기 엔진의 생동감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오늘날 유일무이한 뒷바퀴굴림 바탕 자연흡기 세단이라서 더더욱
차분한 승차감과 자연흡기 6기통 매력에 취해 신나게 쏘다니다 보니 620km를 넘게 달렸다.
13시간 넘도록 탔는데도 더 달리고 싶을 만큼 운전이 즐거웠다. 다만 연료 효율은 그저 그렇다.
620.8km 주행 후 기록한 트립컴퓨터 평균연비는 1L에 10.2km. 주로 고속도로를 달렸는데도 10km/L를 겨우 넘겼다.
무거운 구형 플랫폼(제네시스 G80보다 한 세대 전 플랫폼을 쓴다)과 커다란 자연흡기 엔진의 기름진 주행감은 사랑스럽지만, 그만큼 한계는 명확했다.
K9가 호텔 입구에 들어온다면, 어느 문을 열어 맞이해야 할까? 쉽지 않은 문제다. K9는 뒷자리가 쾌적하지만, 앞자리는 즐겁다.
굳이 비유하면 제네시스 G80보다 점잖고 G90보다 가뿐하다.
어디를 타도 만족스러우니 호텔 직원으로서는 차주가 어디서 내릴지 예측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겠다.
참, 20여 년 전 닿지 못했던 기아 플래그십 세단의 목표가 이제는 완연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