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컬레이드 1000km 시승기… 낭만에 흠뻑
에스컬레이드 1000km 시승기… 낭만에 흠뻑
나는 미국차가 좋다. 정확히는 1950년대 후반 아낌없이 화려했던 미국차를 동경한다.
기다란 트렁크와 보닛이 앞뒤로 붙은 캐딜락 엘도라도로 쭉 뻗은 도로를 누비는 상상을 할 정도로.
그러나 그때 정통 아메리칸 럭셔리는 두 차례 오일쇼크 충격으로 지금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아니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 2011년 단종한 링컨 타운카가 최후의 혈통인 줄 알았건만, 스리슬쩍 SUV가 바통을 이어받았던 모양이다.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ESV와 함께 1000km를 달리며 원 없이 풍요롭던 그 감각을 충분히 누렸다.
하긴, 지금은 이 차가 캐딜락을 넘어 미국 최대 규모 자동차 제조사 제너럴 모터스를 대표하는 명실상부 미국의 기함이다.
사진 속 자태를 보라. 이 차는 절제를 모른다. 덩치를 마음껏 늘렸더니 기다란 휠베이스(3407mm) 뒤로도 오버행이 길쭉하게 늘어졌다.
우리가 알던 SUV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난 비율이다. 마치 자가용이라기보단 특수 자동차를 보듯 생소하달까.
전체 길이 5765mm로 그 크다는 롤스로이스 컬리넌(5341mm)마저 우습게 웃도니 말 다 했다. 덩치뿐만이 아니다.
가까이 다가서면 전동 발판이 스르륵 내려오고 소프트 클로징 기술로 부드럽게 문을 닫는다.
동승자 손이나 겨우 닿는 널찍한 실내엔 세미 아닐린 가죽과 천연목재 장식, 스웨이드를 잔뜩 둘렀다. ‘크고 화려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운전석에 앉으면 크기는 더더욱 크게 다가온다. 거대한 보닛이 앞으로 펼쳐지고 뒤로는 트렁크 유리창이 아득하리만치 멀리 떨어졌다.
‘큰 차’에 열광하는 나로서는 집채만 한 차를 운전할 생각에 절로 입꼬리가 올랐다.
누군가에겐 부담스러운 크기겠지만, 좁은 길에서 큰 덩치를 조작하는 번거로움마저 내겐 (조금 변태 같지만) 크기를 체감하는 즐거움이다.
11번째 1000km 여정은 충청남도 부여군과 광주광역시를 경유하는 코스. 출발지는 언제나처럼 서울이다.
에스컬레이드는 일단 도로에 오르면 덩치 부담은 크지 않다.
차로를 꽉 채우고 보닛 너머 사각지대도 넓지만, 널따란 도로 위에서는 조금만 더 신경 쓰면 그만이다.
되려 큰 차의 장점만 남는다. 3470mm 휠베이스로 노면 충격에 진중하게 흔들리며, 커다란 차체의 든든함도 좋다.
비록 연비는 눈을 의심할 만큼 극악이었지만.
서울을 빠져나오며 드디어 머릿속으로 그리고 그렸던 대형 미국차로 곧게 뻗은 도로를 달리는 상황이 펼쳐졌다.
상상 속 그대로다. 에스컬레이드는 미끄러지듯 여유롭게 항속했다. 무려 2885kg 무게가 내달리는 관성에 흔들림이 깃들 틈은 없다.
앞쪽에선 8기통 엔진이 부드럽게 회전하며 매끄러운 승차감에 풍요를 더했다.
놀랍게도 에스컬레이드 골격은 사다리형 프레임이다.
도로 위에서 신경질적으로 흔들리는 KG 모빌리티 렉스턴 아래 깔린 골격과 같은 종류다.
그러나 엄청난 무게와 기다란 휠베이스, 낭창낭창한 에어서스펜션과 1000분의 1초 단위로 노면을 읽고
감쇠력을 조절하는 마그네틱 라이드 컨트롤 댐퍼가 어우러져 골격의 태생적 한계마저 말끔히 지워버렸다.
가속 성능은 어떨까. 차분한 주행감각을 계속 누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시승인 만큼 평화를 깨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배기량이 깡패란 말은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다. 차로를 꽉 채운 크기가 무색하게 활기차게 속도를 붙인다. 더구나 치솟는
V8 엔진 소리와 함께 토크가 끓어오르는 자연흡기만의 가속 감각이 상쾌하다. <탑기어>가 계측한 0→시속 100km 가속 시간은
세 차례 평균 6.5초. 6.2L 엔진의 넘치는 힘(최고출력 426마력, 최대토크 63.6kg·m)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